산행... 나를 비우는 시간...

19.4.26 홍천 척야산(2) ; 산행이라기에는 좀... ^^;;

산골 낚시꾼 2019. 4. 27. 11:43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있는 척야산 문화수목원 꽃동산입니다.

(강원 홍천군 내촌면 동창로 282 /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306-1) 































척야산 역사 문화 공원(출처:화양의 예맥;한국문인협회 홍천지부)

‘척야산 역사문화공원’은 물걸리 동창기미 만세공원과 함께 팔열사의 넋을 추모하고 항일 투사의 애국 애족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사업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물걸리’하면 ‘동창만세운동’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을이다.

‘물걸리’하면 어디냐고 하지만 ‘동창’하면 금방 알아듣는다. ‘동창’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 ‘농협비료창고’ 터다. 

‘동창’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 사창(司倉) 제도에서 비롯된다. 사창은 ‘대동미’를 수집 보관하는 창고다.

‘대동미(大同米)’는 조선 중기이후 ‘대동법(조선 선조41년-1608년-이원익에 의하여 실시 중앙에 선혜청을 두었다)’에 의하여

공물(貢物-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미곡(쌀)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던 납세 미곡을 말한다.  

‘동창’이 물걸리에 들어섰던 이유는 영서 내륙의 교통 중심지였고 강을 이용한 물류 운송이 가능했다는 점이라 추정한다.    

홍천군지에도 ‘홍천에는 동서남북 4방에 동창 북창 서창 남창으로 불리는 대동미 창고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창에 서석 내촌 인제부 일부지역의 특산물과 ‘대동미’를 수집·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따라서 물걸리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장마당이 형성되고 주막거리와 마방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 기미만세공원을 조성하는데 많은 힘이 되어주고 다시 자신의 사비를 들여 척야산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한 것은

동창기미만세기념사업회 김창묵회장이다.

김창묵 회장은 1922년 6월 16일 생으로 서석면 수하리에서 태어나 17세 때 가난에서 탈출하고자 중국으로 갔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서울에서 젊음을 보냈다.

약소민족의 숙명 같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것이 성공의 밑거름이 되어 동대문 상가에서 터를 늘리고 지금의 동창기업을 만들었다.

1988년 고향인 홍천에서 동창마을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순직한 팔렬사를 추도하는 사업을 하는데 좀 도와달라는 청을 받았다.

정신없이 사업에만 몰두하던 그는 이제 고향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흔쾌하게 받아드려 기미만세공원을 조성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런 저런 일로 자주 고향에 드나들면서 이곳이 동학운동의 마지막 혁명의 터였고 홍천군의 3.1만세운동에 발화점이 된 유서 깊은 곳임을

알게 되자 이때부터 역사를 조명하고 선열의 혼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기념비적 공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20여년에 걸쳐 심혈을 기우려 현재의 척야산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만주벌판을 터 잡던 관개토대왕의 능비를 이곳 척야산에 똑같은 규모와 모양으로 세우고 있는데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우리의 장엄한 역사를 알리고자 함이란다.

또한 이 역사문화공원에는 김덕원 의사의 비가 있는데 ‘장두 김덕원 의사’는 1919년 4월3일 동창에서 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투사다.  

1876년 11월26일 물걸리에서 태어나 8세에 결혼하고 1919년 생계수단으로 마방을 차리고 ‘말강구’(곡물 중개인)를 한다.

그 후 마방을 중심으로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제의 만행과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상황을 접하면서

물걸리를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45세가 되던 1919년 4월3일 물걸리, 와야리, 문현리, 장평리, 수하리, 인제 상남, 내면 방내에서 모인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동창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만세삼창에 이어 내촌면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군중의 함성에 일본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이순극(李順克)’ ‘전영균(全榮均)’ ‘이기선(李基先)’ ‘이여선(李麗先)’ ‘연의진(延義鎭)’ ‘김자희(金自喜)’ ‘전기홍(全基弘)’ ‘양도준(梁道俊)’등

팔열사가 순국하고 김덕원은 복골 은장봉으로 피신한다.  

1923년 일제의 관헌에 체포-춘천 형무소에 수감 1927년 춘천 형무소에서 석방되고,

마방을 정리하여 항골 응달말로 이사하여 옥고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42년경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척야산 역사문화공원을 설계도 기술도 없이 손수의 노력으로 만든 김창묵 회장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에서 그런지 많은 연세에도 지치지 않고 젊은이 못지않은 기력으로

땀을 흘리고 피를 흘려가면서 직접 이루어온 것이다.

그는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번창한 미래를 당부하기를 잊지 않는다.